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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라거 맥주는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 가볍고 시원하게 마시는  International Pale Lager, Pale Lager, Light Lager. 

음용성도 좋고 시원하며 기름진 음식과 먹을 때 너무 좋습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치맥' 하면 떠오르는 맥주 종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칼스버그 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칼스버그

 

 

축구를 좋아하는 남성분들은 예전에 리버풀의 스폰서로 유니폼에서도 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간혹, 50대의 기성세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대학시절에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선배가 술을 사준다고 맥주를 마시러 가면, 그 당시 처음으로 접해본 외국 맥주가 

칼스버그였다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드시곤 하십니다. 

 

 

 

 

맥주 스타일은 크게 라거(Lager)와 에일(Ale)로 나눌 수 있습니다. 라거는 하면 발효 에일은 상면발효, 발효방식에 따라 나누는게 일반적입니다.

오늘은 하면발효 맥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서 써보려고 합니다!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북독일에서 영국풍의 상면발효 맥주가 한창 양조되었습니다.

그 당시 북독일의 양조 도시인 브레멘, 함부르크, 도르트문트, 쾰른 등이 있습니다. 영국은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기술 혁신이 일어났고 맥주 제조업에도 최신 기술이 도입되며

대량생산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세계의 모범으로 인식된 영국으로 유럽의 제조 기술자들은 기술을 배우러 갔습니다. 그렇지만, 상온에서 발효되는 에일 맥주는 유해균에 오염돼 부패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여 미생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당시의 설비와 기술로는 산패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나 여름철에는 유해균 감염이 더욱 기승을 부려 맥주를 전부 폐기 처분하게 되고, 도산하는 경우도 즐비했습니다. 그리하여 맥즙의 농도를 높이고 홉을 다량으로 넣은

맥주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5세기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역의 양조사들은 추운 겨울에 저온에 장시간 발효/숙성 시키는 맥주가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실용화를 하게 됩니다. 산에다가 굴을 판 다음 

강에서 잘라온 얼음을 채워 저장실을 만들어 보관하면 여름이 지나도 산패하지 않고 잘 보관 되었고, 높은 양조 성공률을 보였죠.  그리하여 양조장을 저온 저장고로 설계해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2층에는 강의 얼음으로 가득 채우고 1층은 발효 공간, 지하에는 저장고를 두었습니다.

 

 하면 발효 맥주의 시작은 바이엔슈테(Weihenstephaner) 양조장의 '가브리엘 제들마이어' 부자와 빈의 슈바체트 양조장의 '안톤 드레어'의 공이 컸습니다. 제들마이어 2세는 드레어와 협력하여 비교적 순수한 하면 발효 효모를 분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제들 마이어 밑에서 양조를 깊이 연구했던 야콥센은 1845년 뮌헨의 하면발효 효모를 얻어,

작은 병 2개에 담아 고국인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갔습니다. 

효모의 온도가 높아지면 급격히 사멸하기에 중간중간에 우물물을 퍼 효모가 담긴 병을 식히며 밤낮으로 마차를 달렸습니다. 다행히 효모는 건강하게 운반이 되었고, 덴마크에서도

최초로 하면발효 맥주를 양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칼스버그 양조장(Carlsberg Brewery) 입니다.

 

 

 

 

 

칼스버그 맥주를 탄생시킨 야콥센은 연구소를 개설해 화학과 미생물 분야에도 업적을 남겼는데요.

연구소에서 미생물 분야에서 근무한 한센(Hansen)은 효모를 분리하는 데 성공해 효모 순수 배양법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맥주 공장에 미생물을 관리하는 신세계를 열어줬습니다.

1883년 한센은 공장의 이름을 따서 'Saccharomyces carlsbergensis'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후에는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열처리 살균법 (pasteurization)을 보급시켜 맥주에 효모가 제거됨으로써 장기보관이 가능해졌습니다.

 

칼스버그 효모를 만든 크리스티안 한센 박사 

 

 

칼스버그는 아들의 이름인 '칼(Carls)'과 '언덕(Berg)'를 합친 이름입니다. 해외에서 맥주 양조과정을 위해 유학을 다녀온 아들 '칼'에게 아버지는 새로 만든 공장을 넘겨줬고, 아들의 공장에서는 에일맥주를 만들기를 원했지만, 아들은 전혀 

그럴 맘이 없었고, 칼이 만든 맥주는 아버지와 같은 라거 맥주였습니다. 자기 스타일대로 만든 맥주로 아버지와 시장에서 경쟁을 했고, 칼스버그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가지의 맥주가 나왔습니다. 아들의 양조장은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여서, 1879년에는 연간 생산량을 제한시키고, 칼스버그라는 이름을 달고 팔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뉴 칼스버그 (Ny Carlsberg)라고 이름을 짓고 생산량에서 칼스버그를 따라잡게 됩니다.  결국, 각종 법정공방이 벌어지게 되고, "두 미치광이가 상대가 지은 이름을 가리려고 표지판 크기를 점점 키웠다"라고 연구소 직원의 일기장에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1886년에 두 사람은 앙금을 풀고 화해를 하고, 로마에 가 함께 예술품을 수집하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렇지만 188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전재산은 칼스버그 재단에 기부되었고, 칼스버그 재단은 현재에도

인류를 위한 예술, 과학, 문화 등에 공헌하기 위해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아들은 아버지 취향인 고대 예술품을 모으고 자신의 수집품을 덴마크와 코펜하겐 시에 기부를 합니다. 로댕과 고갱의 작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인 '칼스버그 미술관'이 지어졌습니다

(미술관이 부족하여 하나 더 지어야 했죠..ㅎㅎ)

부자 덕에 19세기 말 코펜하겐은 예술의 도시로 거듭납니다.

 

 

 

칼스버그 옛 양조장의 당시 인물들
칼스버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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